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해군 항공대 (문단 편집) === 설계 문제점 === 해군이 운용한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매우 길었으며 무장도 당대 기준로는 강력한 20mm 기관포를 장비하는 등 화력도 쓸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능을 저출력 엔진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대부분 자동 방루 연료 탱크라든지, 조종석에 방탄 설비 같은 방어수단이 없다시피 했다. 이는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항공기와 지상기지에서 운용한 항공기 모두 적용되는 문제점이었다. 오죽하면 미 해군 항공대의 일본 해군 항공대 항공기에 대한 평가가 '''원샷 라이터'''였겠나? 그나마 대전말에는 조금씩 도입되기는 하지만 육군이 [[Ki-43 하야부사]]에서부터 일찌감치 방탄판과 자동 방루 탱크를 도입한 것에 비하면 해군은 훨씬 늦게 도입한 셈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점감요격작전에 따라서 적의 전력을 줄이기 위해서 최대한 원거리에서 항공모함의 직접 손실은 줄이도록 항속거리와 화력을 늘리지만 어차피 함대결전을 준비하는 단계이며 1회 공격에 계획에 명시된 최대한의 타격을 줘야 하므로 방어력이나 생존성 같은 것은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다. 어차피 기술력 딸려서 저출력 엔진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킨다는게 어렵기도 했지만 이후의 후속기들도 그런 경향을 지속하게 된다. 이는 항공모함의 핵심은 우수한 함재기와, 그걸 제대로 다루는 조종사 및 정비병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항공전력의 운용을 보면 항공을 중시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후진성이 드러난다. 육군이 중일전쟁을 치르며 항공대와 기지의 연계를 느슨하게 해 항공대가 기지를 옮겨다니며 작전할 수 있게 만든 일명 '공지분리제도'를 1937년에 전격 도입한 반면 해군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배는 멀쩡했던 즈이카쿠를 놀려두는 계기가 되었고, 해군이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44년 3월, 실제 조직 개편은 마리아나의 패배 이후인 1944년 7월이었다.[*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치르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투기 중점 체제를 확립했으며, 19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 방면의 항공 소모전을 겪은 후 육군은 전투기를 2.5배 가까이 늘리며 전투기:폭격기 비율을 3.5:1로 맞추었다. 그러나 해군은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조차 치열한 항공 소모전을 치르면서도 전훈을 반영하지 않아 전투기 중점 체제로 전환한 것은 '''1945년 들어서'''였다. [[http://navgunschl2.sakura.ne.jp/tenji/40_senkun_navair.html|#]] [[http://www.tsubasakai.org/Senshi_Kiji_283HP_000.htm|#]]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31186|#번역]] 상기 연보 해당 부분의 작성자인 유라 후지오(당시 2좌, 간부학교 전사교관실)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기고문, 상기 연보의 요약본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때는 이미 항공모함에 실을 항공전력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해군의 항공주병론이라고 해봤자 함대결전의 보조전력으로서 [[폭격기 무적론]] 수준에서 노는 후진적인 수준이었던 것이 실상. 확실한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격 일변도 사상에 의한 공격기/폭격기 중시는 폭격기무적론의 한계를 상대적으로 빨리 실감하고 전투기 위주로 전력을 재정비한 육군보다도 후진적이었으며 [[G4M|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폭격기]]를 [[A6M|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전투기]]로 호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쳐지지 않았고 신형 전투기의 개발 및 양산조차 연합군은 고사하고 같은 일본 육군에게조차 뒤처진다. 육군이 [[Ki-61 히엔]]을 의욕적으로 도입하고 약 3,000여기를 생산, [[Ki-84 하야테]]를 1944년에 양산하기 시작해서 신뢰성은 문제가 많았지만 3,500여기를 생산한 반면 해군은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다 합쳐도 1,900기 남짓이며 그나마도 그중 1천기가 '''초기불량도 고치지 못하고 양산명령이 떨어진''' [[N1K-J 시덴]], 그나마 전투기와 요격기로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개량형 시덴 카이와 [[J2M 라이덴]]은 각각 4~500여기 남짓이 고작, 제로센의 후계기로 기대를 모았던 [[A7M 렛푸]]는 시대착오적인 ROC와 맞물리며 양산조차 되지 못한다. 반면 단순 계산으로도 같은 엔진을 쓰는 라이덴을 두 대 만들 수 있는 '''종이비행기''' [[G4M]] 1식육공은 2,200여기나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연합군과의 항공전력의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고 이는 항공요원의 피해를 증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런 저질 항공기로 능력 이상의 무리한 공세를 펼친 결과 서전기의 우세를 뒷받침했던 숙련 항공탑승원의 괴멸을 불러왔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이 '''너무 갑작스럽게''' 당하는 바람에 싸울 기회가 있었던 히류를 제외한 3척의 파일럿 손실은 크지 않다. 본격적으로 숙련 파일럿이 '''갈려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벌이며, 물론 이 와중에도 전함전력은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을 기점으로 개전시의 숙련 탑승원은 사실상 소진되었고, 1943년 4월의 이(い)호 작전에서는 재건 중이던 3함대의 항모 항공대를 기지항공대로 투입해 소진시키는 악수까지 둔다. 해상 항법 및 항모 이착함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항모 항공대는 기지항공대보다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결전만을 고려해 전력을 정비한 결과 장기 육성능력이 떨어지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적이었던 니미츠의 평가가 [[압권]]으로, '1급 항모 탑승원의 큰 손실은 일본 항모부대의 전력을 이제까지 이상으로 크게 저하시켰다'라고...(니미츠의 태평양전쟁사 일본어판 162p) 당연히 오자와의 3함대는 이 방침에 반발했지만, '''소위 항공주병론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오자와를 직접 만나 양해~~라고 쓰고 강요[[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라고 읽는다]]~~를 받아낸다.[* 『戦史叢書39 大本営海軍部・連合艦隊4 第三段作戦前期』 118p] 1943년 10~11월의 로(ろ)호 작전에서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같은 일이 반복]]되고, 결국 1944년 2월 들어서야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던 항공전력의 숙련도 및 재건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쳐 그 결과가 [[필리핀 해 해전|칠면조 사냥]]. 그나마 배는 멀쩡하게 완성된 운류급 3척도 사실상 무용지물, 1944년 후반기부터 항공공격은 거의 대부분이 [[카미카제]]로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